다도의시작과 다도의미학

30/03/2019

다도[茶道]의 미학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본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현미경으로 보는 듯 선하게 보인다.
생명 있는 하나하나가 자연의 섭리와 조화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 것을 역행할 때에는 과감하게 하늘은 가만두지 않는다. 그것이 당대가 되지 않는다면 후손에게까지 이어가게 만든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법칙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흔히 차를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차는 우리 일생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왔다. 그러나 한번쯤 차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그것은 道(도)요, 참선이요, 형식 속에 예의범절이 내재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이 차가 주는 진정한 미학이며 아름다운 매력이다.


(1)차[茶]의 뜻을 알고 마시자


우리는 차의 일반적 의미와 해석으로는 식사 후, 여가 시간에 즐겨 마시는 그래서 시시 때대로 현대인에게 가장 쉽게 구입해서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기호음료를 의미한다.
차는 한자로 다[茶]라 쓴다. 차란 말의 기원은 중국에서 유래 되었다. 중국의 차 발음인 "tay"가 한국의" ta" 발음의 영양을 주어 "차 "혹은 "茶"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cha"또는 지방의 따라 te"라고도 한다.
그러나 차는 우리 문화에서는 단지 음료로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사찰이나 전통적 민속에서
는 차를 다도라 하여 그것을 매개로 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
하게 하기위한 일 년의 수양 행위를 가르친다.

즉, 차라고 하는 물질적 의미의 세계와 도라고 하는 정신적 세계를 결합하여 차라는 매개를 통하여 진리의 경지로 도의 차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다도는 차 잎 따기부터 차를 달여 마시기까지의 다사[多事]를 통하여 몸과 마음을 수련하며 가장 정적이면서 자연의 도리를 알고 인간 행위의 덕목인 덕을 쌓는 행위를 가르친다고 본다. 그것은 차를 통하여 '인간 정신'의 도를 말하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옛 선비들의 흔적을 통하여 충분하게 가름 할 수가 있다.
신라의 최고의 학자로 추앙 받았던 최치원은 "차를 얻었으니 근심을 잊게 되었다."고 했고 고려 말 이방원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던 절개의 충신 정몽주는"차 마시는 버릇으로 세상의 시름을 잊는다."고 했으며, 고려말 충신 이숭인 역시"하늘아래 떠도는 한을 씻어준다."고 말했으며, 조선조 초 이목 선생은"차를 마시니 근심과 울분이 사라지고 웅혼한 기운이 생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우리 옛 선비들은 다도를 생활화함으로서 예의범절을 배우며 자기를 인내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까지도 배우며 길들려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차 생활을 심신을 다스리는 하나의 수단으로 일상의 생활로 보았다.

다도의 역사


우리나라의 다도의 역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참고하면 선덕왕 때부터 있어 왔는데, 신라 흥덕왕 3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이때에 와서 아주 성행하였고 승려와 화랑들 사이에 음다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또,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불교문화가 성행 사찰에서 다도 생활이 매우 성행하고 민가의 까지 널리 보급되어 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의 큰 행사였던 팔관회, 연등회, 연회, 사신 맞이등에 진다[進茶]라는 절차가 있어 

차를 올리고 차를 공급하는 관청까지 두었다고 하니, 고려 시대에는 차 생활이 널리 보편화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음다[飮茶]의 풍속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 했고 그 당시 상납과 관리들의 강한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차 재배 농민들은 스스로 차의 재배를 하지 않고 나무를 베어 냈다고 한다. 반면 선비들의 의해 음다 풍속은 이어져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음다 풍속이 널리 유행하면서 차를 밥 먹듯이 했다 하여 "다반사"란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차와 곡식을 갈무리 한다 해서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는 등 전래 단어들이 이 시대의 차 보급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정조 때 다산 정약용은 차와 관련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면서 차의 보급에 열의를 보였고 초의 선사[草衣禪師]의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면서 우리 차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의선사(艸衣禪師)

우리의 차 문화를 애기하면서 당연히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초의선사에 대한 애기이다. 초의 선사는 우리 다도 문화의 선각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초의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하신 분이다
성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인 그래서 스님을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에 태어난 스님은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지
나는 승려의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그 승려가 출가 제의에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대표작
명선은 초의선사의 호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과 평생의 지우로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으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유배생활 하든 24년 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물론 초의스님은 다산 선생님께 다선(茶禪)의 진미를 더욱 깨쳐으며 다산은 《동다기(東茶記)》를 쓰고 초의는 《동다
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차 문화의 다도는 이렇게 두 분을 만나서 중흥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필자┃하운 김남열
- 시인, 현 브레이크뉴스 객원기자
- 문화 기획자
- 도서출판 여여심 대표
- 계간 무애, 카스 시문학 편집 주간